迎恩門(영은문:Yeongeunmun)
この門は、漢城の西大門である敦義門のすぐ外、義州を経て北京に至る街道に建てられていた。中国の皇帝の臣下であり、冊封国であった朝鮮の歴代の王が、中国の皇帝の使者を迎えるための門であった。清代には「三跪九叩頭の礼」によって使者を迎えた[2]。1407年には慕華楼という使臣のための建物が建てられていたが、1536年に金安老の建議でそのそばに「迎詔門」を立てた。しかし1539年に明の使臣で来た薛廷寵は、使臣は中国皇帝の詔書や勅書や下賜の品々を持ってくるのに、門の名前が「詔だけを迎える」ではおかしいと言いがかりをつけ、朝鮮側は名前を「迎恩門」に変えた。1606年に来た明の使臣朱之蕃が書いた門の扁額が国立古宮博物館にある[1]。
[1]
国立古宮博物館 公式サイト「遺物案内
: 遺物検索」 「영은문」と入力して検索すると見られる。
[2]
崔基鎬 『韓国 堕落の2000年史』 祥伝社, 2001年 ISBN 9784396611354
国立古宮博物館の説明
中宗33年(1538)朱之蕃書、彫り上げ、117x239.5中国使臣を応待するための家所である慕華館
(慕華館)正門(ヤングウンムン)にかけた扁額。慕華館は敦義門(西大門)外西北の方に位して中国使臣を応待するための家所だったが、高宗33年
(1896)にソ・ジェピルなどが独立協会を立ててこの席に独立門を立てて自主独立を表示した。黒い土台に左右7枚になっているし、わくは朱漆の上に8葉蓮花文と唐草文を描いて入れた。裏左右弁下端に掛けがねを1個ずつ附着した。
歴史の転機となった「迎恩門(영은문)」の解説にもかかわらず、「迎恩門(영은문)」を説明していない。額の解説をするのみである。
※ 韓国の歴史教科書も、このように国の恥辱となる史実は、いちおう項目があるものの説明しないか、注目させない手法が多々使われている。
迎恩門(영은문)—>独立門(독립문)
慕華館(모화관)—>独立館(독립관)
独立門 (독립문:Dongnimmun)
独立館(독립관)
日清戦争により日本が“清”に勝利し、下関条約にて“清”の冊封体制からの李氏朝鮮の独立を認めさせた。これにより李氏朝鮮は“清”の支配から解放され、自主独立国家として歩みだすことになり、その記念として“清”への服属の象徴の一つであった迎恩門(영은문)を壊し、そのすぐ隣に建設された。また、迎恩門(영은문)に隣接して建てられた慕華館(모화관)は独立館(독립관)と改名された。
韓国においては独立門(독립문)建設の歴史背景が正しく教えられておらず[2]、独立門(독립문))は「日本からの独立」を記念する門であると誤解されているという[2]。正しくは「“清”の冊封体制からの独立」を記念したものである。
2009年10月28日、周囲を整備して独立公園としてリニューアルオープン。ひとつの公園にしたことにより西大門刑務所歴史館の施設などと関連性を高め、従来より訪れやすい環境を作った。[歴史イメージの歪曲]
[2]
萩原遼・井沢元彦
『朝鮮学校「歴史教科書」を読む』 祥伝社、2011年。ISBN 978-4-396-11257-8。p87-p89。萩原遼・井沢元彦
『朝鮮学校「歴史教科書」を読む』 祥伝社、2011年。ISBN 978-4-396-11257-8。p87-p89。
実は2~3ヶ月前まで、韓国政府(government)による解説ページがもう一つあった。
[日本語] http://sca.seoul.go.kr/japanese/culturalAsset.jsp?sCode=100539&sClssCode=8&sClssCode2=26
[韓国語] http://sca.seoul.go.kr/korean/culturalAsset.jsp?sCode=100539&sClssCode=8&sClssCode2=26
しかし現在は供にリンクが切れている。サイトを閉鎖したようだ。
日本語のページの方が内容が詳細で史実と一致していたが、韓国語のページでは迎恩門(영은문)の解説は無く、別のリンクを辿るように誘っていた。そのページが今も残っている。それが以下のページ。
西大門独立公園(서대문독립공원)
http://www.visitseoul.net/kr/article/article.do?_method=view&art_id=265&lang=kr&m=0004003002002&p=03
独立門(독립문)より以前に迎恩門(영은문)があった事は書かれていない。
これが韓国の歴史の消去&歪曲&捏造だろう。こうして韓国では現在も歴史の改変が粛々と行われている。
韓国に歴史が無いのも道理
Footnotes
●^
崔基鎬
『韓国 堕落の2000年史』祥伝社黄金文庫、201頁
●^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초판 2쇄,
서울:
태학사.
ISBN 89-7626-546-7 04910
●^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3~34쪽쪽
“독립협회는
단지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추진위원회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33쪽)
그것은
바로
청국으로부의
독립을
의미한다.(34쪽)”
●^ “책갈피
속의
오늘
1910년
이완용,
한일
병합안
강제가결”,
《동아일보
사회》, 2006년
8월 22일
작성.
●^ “영은문 (迎恩門)” (in Korean). Empas / EncyKorea.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779&v=46. Retrieved
2008-07-28.
●^ “모화관 (慕華館)” (in Korean). Empas / EncyKorea.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39090. Retrieved 2008-07-28.
●^ To be precise, this
routine was established during the Manchu Qing Dynasty[citation needed]. Before
the Hongjewon was constructed, the nearest station was the Byeokjegwan in
modern-day Goyang. Due to its great distance from the capital, the envoys of
Ming arrival at the capital was often delayed until night. Fore more
information, see Tongmungwan-ji 通文館志, Vol. 5, Sadae
事大, Gyoyeongui 郊迎儀.
●^ Jungjong Sillok
中宗實錄: the dingwei (10th) day of the 4th month, Jungjong 34
●^ Injo Sillok 仁祖實錄
仁祖 29卷, 12年(1634
甲戌 /
명
숭정(崇禎)
7年) 6月 14日(戊辰)
예조가
아뢰기를
“그러나
이것은
외국에서
응당
행하여야
할
예는
아닙니다.”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Korean)
●^ Taejong Sillok
太宗實錄: the guimao (22nd) day of the 8th month, Taejong 34
●^ Sejong Sillok
世宗實錄: the yiyou (15th) day of the 12th month, Sejong 12
●^ Jungjong Sillok
中宗實錄: the renwu (2nd) day of the 1st month, Jungjong 32
●^ Ŏ Sook-kwon 魚叔權:
Folkloristic Notes (P"ae-kwan Chap-ki 稗官雜記), Im
Dong-kwun et al. ed. Joseon Folklore Texts in Chinese Characters, pp. 98-99,
영은문(영은문:Yeongeunmun)
이 문은, 한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의 바로 밖, 도리주를 거쳐 북경에 이르는 가도에 지어지고 있었다.중국의 황제의 신하이며, 책봉국인 조선의 역대의 왕이,중국의 황제의 사자를 맞이하기 위한 문에서 만났다.청대에는 「3궤9고두의 예」에 의해서 사자를 맞이한[2].1407년에는 모화루라고 하는 사신을 위한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지만, 1536년에 김 야스로의 건의에서 그 곁에「영조문」를 세웠다.그러나 1539년에 명의 사신으로 온 설정총은, 사신은 중국 황제의 조서나 칙서나 하사의 물건들을 가져오는데, 문의 이름이「조만을 맞이하는」에서는 이상하면 트집을 잡아조선측은 이름을「영은문」에 바꾸었다.1606년에 온 명의 사신주지번이 쓴 문의 편액이 국립 고궁 박물관에 있는[1].
[1]
국립 고궁 박물관 공식 사이트 「유물 안내
: 유물 검색」 「영은문」라고 입력해 검색한다고 보여진다.
[2]
최기호 『한국 타락의 2000년사 』 쇼덴샤, 2001년 ISBN 9784396611354
국립 고궁 박물관의 설명
중종 33년(1538) 주지번서, 양각, 117x239.5 중국 사신을 응대하기 위한 처소인 모화관
(모화관) 정문(양웅)에 걸친 편액.모화관은 돈의문(서대문) 외 서북쪽으로 위치해 중국 사신을 응대하기 위한 처소였지만, 고종 33년
(1896)에 소・제이 필등이 독립협회를 세워 이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 독립을 표시했다.검은 토대에 좌우 7매가 되어 있고, 끓고는 주홍옻나무 위에 8엽련화문과 당초문을 그려 넣었다.뒤좌우변하단에 고리를 1 개씩 부착 했다.
역사의 전환기가 된「영은문(영은문)」의 해설에도 불구하고, 「영은문(영은문)」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액의 해설을 할 뿐이다.
※ 한국의 역사 교과서도, 이와 같이 나라의 치욕이 되는 사실은, 일단 항목이 있는 것의 설명하지 않는지, 주목시키지 않는 수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영은문(영은문)-->독립문(독립문)
모화관(모화관)-->독립관(독립관)
독립문 (독립문:Dongnimmun)
독립관(독립관)
청일 전쟁에 의해 일본이“청”에 승리해, 시모노세키조약에서“청”의 책봉 체제로부터의 이씨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게 했다.이것에 의해 이씨 조선은“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주 독립국가로서 걸음 내게 되어, 그기념으로서“청”에의 복속의 상징의 하나인 영은문(영은문)을 부수어, 그 바로 근처에 건설되었다.또,영은문(영은문)에 인접해 지어진 모화관(모화관)은 독립관(독립관)과 개명되었다.
한국에 있어 독립문(독립문)건설의 역사 배경이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지 않고[2],독립문(독립문))은「일본으로부터의 독립」를 기념하는 문이라고 오해 받고 있는이라고 하는[2].정확하게는「“청”의 책봉 체제로부터의 독립」를 기념한 것이다.
2009년 10월 28일, 주위를 정비해 독립 공원으로서 리뉴얼 오픈.하나의 공원으로 한 것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시설등과 관련성을 높이고종래부터 방문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역사 이미지의 왜곡]
[2]
하기와라료・이사와 모토히코
『조선 학교「역사 교과서」를 읽는 』 쇼덴샤, 2011년.ISBN 978-4-396-11257-8.p87-p89.하기와라료・이사와 모토히코
『조선 학교「역사 교과서」를 읽는 』 쇼덴샤, 2011년.ISBN 978-4-396-11257-8.p87-p89.
실은 2~3개월전까지, 한국 정부(government)에 의한 해설 페이지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어] http://sca.seoul.go.kr/japanese/culturalAsset.jsp?sCode=100539&sClssCode=8&sClssCode2=26
[한국어] http://sca.seoul.go.kr/korean/culturalAsset.jsp?sCode=100539&sClssCode=8&sClssCode2=26
그러나 현재는 보조자에 링크가 끊어져 있다.사이트를 폐쇄한 것 같다.
일본어의 페이지가 내용이 상세하고 사실과 일치하고 있었지만, 한국어의 페이지에서는 영은문(영은문)의 해설은 없고, 다른 링크를 더듬도록(듯이) 권하고 있었다.그 페이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그것이 이하의 페이지.
서대문 독립 공원(서대문독립공원)
http://www.visitseoul.net/kr/article/article.do?_method=view&art_id=265&lang=kr&m=0004003002002&p=03
독립문(독립문)보다 이전에 영은문(영은문)이 있던 일은 쓰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의 역사의 소거&왜곡&날조일 것이다.이렇게 해 한국에서는 현재도 역사의 개변이 조용하게 행해지고 있다.
한국에 역사가 없는 것도 도리
Footnotes
●^
최기호
『한국 타락의2000년사』쇼덴샤 황금 문고,201페이지
●^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초판 2쇄,
서울:
태학사.
ISBN 89-7626-546-7 04910
●^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3~34쪽쪽
“독립협회는
단지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추진위원회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33쪽)
그것은
바로
청국으로부의
독립을
의미한다.(34쪽) ”
●^ “책갈피
속의
오늘
1910년
이완용,
한일
병합안
강제가결”,
《동아일보
사회》, 2006년
8월 22일
작성.
●^ "영은문 (영은문)" (in Korean). Empas / EncyKorea.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779&v=46. Retrieved
2008-07-28.
●^ "모화관 (모화관)" (in Korean). Empas / EncyKorea.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39090. Retrieved 2008-07-28.
●^ To be precise, this
routine was established during the Manchu Qing Dynasty[citation needed]. Before
the Hongjewon was constructed, the nearest station was the Byeokjegwan in
modern-day Goyang. Due to its great distance from the capital, the envoys of
Ming arrival at the capital was often delayed until night. Fore more
information, see Tongmungwan-ji 통문관지, Vol. 5, Sadae
사대, Gyoyeongui 교영의.
●^ Jungjong Sillok
중종실錄: the dingwei (10th) day of the 4th month, Jungjong 34
●^ Injo Sillok 인조실錄
인조 29권, 12년(1634
갑술 /
명
숭정(숭정)
7년) 6월 14일(무진)
예조가
아뢰기를
"그러나
이것은
외국에서
응당
행하여야
할
예는
아닙니다."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Korean)
●^ Taejong Sillok
태종실錄: the guimao (22nd) day of the 8th month, Taejong 34
●^ Sejong Sillok
세종실錄: the yiyou (15th) day of the 12th month, Sejong 12
●^ Jungjong Sillok
중종실錄: the renwu (2nd) day of the 1st month, Jungjong 32
●^ Ŏ Sook-kwon 어 숙권:
Folkloristic Notes (P"ae-kwan Chap-ki 패관잡기), Im
Dong-kwun et al. ed. Joseon Folklore Texts in Chinese Characters, pp. 98-99,